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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시 모음좋은 시 2022. 3. 28. 11:10
팝콘 같은 벚꽃이 조금씩 팡팡 터지기 시작해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갔었습니다. 주차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걸어와 옆 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차 문을 열지 않고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다 하늘 한 번 보고 가만히 서 계십니다. 조금 후 어깨가 굽은 아주 작고 아담하신 할머니가 걸어오시더니 차 앞에서 멈추십니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신 할머니가 차 옆으로 다가가 차 뒷문을 열고 타십니다. 할아버지는 차 뒷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신 후 운전대에 오르셔서 천천히 출발을 하셨습니다.
빨리 걸어오라고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라고 보채지 않는 서로의 속도가 다른 사랑입니다.
상대가 맞춰주기만을 바라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힘든 서툰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고정희 시인의 시 읽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로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은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둘이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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