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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률 시)이병률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18. 15:37

     

     

    시를 읽는다는 건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쁨, 슬픔, 외로움, 쓸쓸함 등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내 마음을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직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전하는 말들을 보듬고 다독이며 토닥여 주세요.

    미술심리치료, 음악심리치료, 원예심리치료 등 다양한 심리치료가 있지만

    오늘은 시 심리 치료를 하기 좋은 날 입니다.

    내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 주세요.

     

    이병률 시인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좋은 사람들」 「그날엔」 등단했으며 MBC FM4U 'FM 음악도시'라디오 방송작가 활동도 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눈 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등이 있습니다.

     

    시인의 말 "어릴 때,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어요. 시인이 되는 꿈은 그 어려운 때부터 품었던 거였고,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꿈을 이루기까지, 시 말고 다른 것이 삶에 없었어요. 돈이 많아서 시를 쓴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이 없어도 시를 쓴 거라고 해야죠. 그리고 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고요"


     

    백 년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사랑

     

    점 하나를 잘 써야 하겠기에

    인생의 어느 한군데에

    점 하나를 찍어야 했으나

    그 자리가 어디인지를 몰라

    한동안 들고 있었다

     

    점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한 죄로

    큰 돌 하나를 들고 있으라 하여서

    얼마나 들고 있어야 하는지 몰라

    오래 들고 있었다

     

     

     

     

    새벽의 단편

     

    어느 긴 밤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다는 말은

    그 오래된 시간을 부를 수도

    다시금 사용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도 편지를 부치지 않는 동안

    건물은 헐리고 꽃밭이 줄고

    습관은 습관이 되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거나

    어딘가에서 분실되고 말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그 새벽에 새들이 울면

    두 눈 가득 침이 고이던 시절

     

    감히 만나자는 말을 적어놓고 풀칠을 했습니다

    많이 미워한다는 말을 읽었을 때는 말을 잃었습니다

    편지라는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빈 봉투처럼

    돌아볼 단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접지 않았으니

    펼쳐야 할 것도

    봉하지 않았으니 열어야 할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둥근 무지개가 떠 있는 언덕

     

     

     

    사랑의 정처

     

    사랑이 왔으니

    사랑을 쓰란다

    사랑을 쓰라는데

    나는 내 다리가 가렵다

    사랑을 하여서 나는 다리를 잘렸다

    나를 사랑을 하여서 당신은 돌화살을 맞았다

     

    사랑을 쓰잔다

    사랑은 감히 영원이 아니라

    저리 오래 썩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적어야겠으나

    멀리서부터 풀리지 않는 증거들이 떠내려왔다

    사랑이 돌아서 흘러서 왔다

     

     

     

     

    창문의 완성

     

    다음 계절은 한 계절을 배신한다

    딸기 꽃은 탁한 밤 공기를 앞지른다

    어제는 그제부터 진행한다

    엎어놓은 모양으로 덮거나 덮인다

    성냥은 불을 포장한다

    실수는 이해를 정정한다

    상처는 상처를 지배한다

    생각은 미래를 가만히 듣는다

    나중에 오는 것은 모두 아득한 것

    네가 먼저 온다 시간은 나중에 온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해가 진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느라

    다리를 건너다

    다리에서 한없이 쉰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여서

    나에게 던진 질문 따위로 흘러내리고

    그리하여 별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한사코 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에게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랑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람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창밖으로 펼쳐진

    텅 빈 세기의 뒷모습을 기록하려 애썼다

    친구에게 부쳐도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는

    국제엽서는 처음이었다

     

    둥근 나무 벤치가 있는 공원

     

     

     

    사람이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거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 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란 잎들을 매단 큰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쥐에서 오고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

     

    젊은 날 우리 한 사랑을 돌아보지 마오

    눈 비비면 후두둑 떨어지는 소금 같은 시절

    뙤약볕 아래

    물 새는 병을 쥐고 서서

    뽑을 것처럼 머리채를 움켜쥐고 극치를 맞던

    몸부림을 곱씹지 마오

     

    몸 구석구석 철조망에 긁힌 자국과

    때운 살점들 자리

    몸에 박혀드는 못냄새를 맡는 일처럼

    젊은 날 묶어 치운 열매들을 꺼내지 마오

     

    단 우리가 열일곱으로 돌아갈 것인가만 생각하오

    이 세상 다 신어야 할 구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아침

    이마에 내려앉은 슬픔의 그림자 따라

    좋은 옷 한 벌 훔쳐 내달릴 수 있을 것인가

     

    문득 우리가

    우리가

    열일곱 살로 돌아가

    첫 술을 마신다면

     

     

     

     

     

    새 한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저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런데 그다지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마리 지울 길 없다

     

     

     

     

    몸살

     

    한번 녹으면 영원히 얼지 못하는 얼음처럼

    한번 아픈 것이 영원히 낫지 않는다

    낫지 않으니 축적이다

    독을 내몰고 새 독을 품으려니 갱신이다

     

    어쩌면 이토록 한 사람 생각으로

    이 밤이 이다지 팽팽할 수 있으나

     

    저리도 곡선으로 떼를 지어 할 말이 많은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곳으로 이끌리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냐

     

    어제 단어가

    오늘은 전부가 생각나지 않았다

     

    자주색 꽃이 활짝 핀 라벤더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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