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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읽기 좋은 날 선운사에서 최영미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20. 17:54

     

     

    벚꽃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맺혀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팝콘 같은

    벚꽃이 얼굴을 보여 줄

    것 같아요.

     

    곧 피어날 벚꽃을 기다리며

    시 읽기 좋은 날입니다. 

     

    최영미 시인은 창작과 비평 '속초에서' 등단했으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공항철도>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시를 읽는 오후> 등이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를 읽으면 선운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에 있으며 봄에는 동백꽃, 여름에는 배롱나무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합니다.

     

     

    안개 끼인 숲속 길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다시 선운사에서

     

    옛사랑을 묻은 곳에 새 사랑을 묻으러 왔네

    동백은 없고 노래방과 여관들이 나를 맞네

    나이트클럽과 식당 사이를 소독차가 누비고

    안개처럼 번지는 하얀 가스······

    산의 윤곽이 흐려진다

    신이 있던 자리에 커피자판기 들어서고

    쩔렁거리는 동전소리가 새 울음과 섞인다

    콘크리트 바닥에 으깨진, 버찌의 검은 피를 밟고 나는 걸었네

    산사(山寺)의 주름진 기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절 지붕 끝에 달려 있는 종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다

    아가의 뒤뚱한 걸움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희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까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고 술이

    오르지 않는다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봄날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목련

    왜 피어나야 하는지 모르고

    겨울을 밀어내며

    잎은 꽃이 된다

     

    너의 커다란 손이

    닿기도 전에 나는 터졌지

    네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며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음악을 틀고······

     

    그만해

    태양도 식어.

     

    너와 나의

    하얀 목련이 토해내는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다는 걸

    그러니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 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것을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것을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꽃샘추위

     

    찬바람 속에 봄을 숨겨놓은

    2월이 제일 춥다

     

    겨울이 끝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봄이 오기도 전에

    두터운 외투를 치우고

     

    당신을 숨겨놓은 방은 춥지 않았지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를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돌려다오

     

    언제부터인가

    너를 의식하면서 나는 문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피 묻은 보도블록이 흑백으로 편집돼 아침 밥상에

    올랐다고 일기장에 씌어 있다

     

    푸른 하늘은 그냥 푸른게 아니고

    진달래는 그냥 붉은게 아니고

    풀이 눕는 데는 순서가 있어

    강물도 생각하며 흐르고

    시를 쓸 때도 힘을 줘서

    말이 말을 부르고

     

    나의 봄은

    그렇게 가난한 비유가 아니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마음대로 바라보며 갖고 놀면

    어느새 하루가 뚝딱 가버려

    배고픈 것도 잊었다

    가난은 상처가 되지 않고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리고 싱겁던

     

    나의 봄을 돌려다오

    원래 내 것이었던

    원래 자연이었던

     


     

    기다린다는 건

     

    당신을 기다리며

    그녀 앞에 쌓인 찻잔

    하나,

    둘,

    셋,

    기다린다는 건

    가슴속에 여린 들풀 하나 기르는 것

    물을 먹고 시간을 먹고

    그리움 먹고 무성무성

    가지를 뻗고 새끼를 쳐

    마침내 숲을 이뤘을 때

    그녀 가슴이 온통 푸르게 멍들었을 때

    기다린다는 건

    너무 오래 기다린다는 건

    반란을 꿈꾸는 것

    그녀는 떠나리

    바람 속으로 떠나리

     


     

    사랑의 힘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고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히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은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어쩌자고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 놓는 ,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든 가습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사계절의 꿈

     

    어떤 꿈은 나이를 먹지 않고

    봄아 오는 창가에 엉겨붙는다

    땅 위에서든 바다에서든

    그이 옆에서 달리고픈

    나의 소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꿈은 멍청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어떤 꿈은 은밀해서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나른한 공기에 들떠 뛰쳐나온다

    살-아-있-다-고,

     

    어떤 꿈은 달콤해서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대자 사르르 녹았지

     

    어떤 꿈은 우리보다 빨리 늙어서,

    겨울바람이 불기도 전에

    무엇을 포기했는지 나는 잊었다

     

    어떤 꿈은 나약해서

    담배연기처럼 타올랐다 금방 꺼졌지

    겨울 나무에 제 아름을 새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할 소원은 붙잡지도 않아

    잠들기도 두렵고

    깨어나기도 두렵지만,

    계절이 바뀌면 이직도 가슴이 시려

     

    봄날의 꿈을 가을에 고치지 못할지라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 햇살과 테위블 위에는 차 한잔과 수선화 화분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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