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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인숙 시)황인숙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17. 12:23

    황인숙 시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행복해지는 시가 있는 오늘 하루입니다.

    겨울 외투를 벗어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마음의 외투도 벗어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황인숙 시인은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하여 긍정적인 변형 의식에 기본을 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과 일상에 대한 전복과 일탈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집으로는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는 고독하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등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햇살아래 졸고 있는

    상냥한 눈썹, 한 잎의 풀도

    그 뿌리를 

    어둡고 차가운 흙에

    내리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곳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탄식과 허우적댐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파리를 떨군다.

     

    나무는 창백한 이마를 숙이고

    몽롱히

    시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챙강챙강 부딪히며

    깊어지는 낙엽더미

    아래에

    기둥이 굵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뒷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 하 하 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 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근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바구니에 앉아 있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나를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들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마세요

    하느님도 그를 달래 실 수 없어요

     

    까실한 얼굴을

    절벅거리며 씻다가

    (우리에게는 바빌론강도 없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수돗물가에 앉아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 거예요.

     


     

     

     

    조용한 이웃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사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이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봄날

     

    '전회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넉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는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홍색 벚꽃이 피어 있는 시골길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파란색의 작은 종모양 꽃이 달리는 블루벨이 모여 자라고 있는 나무 숲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애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데이트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기 싫어서

    넘어졌었죠

    넘어진 게 어이없어서

    쫘악 뻗었죠

    당신의 시선의 쇳물

    쏟아졌어요

    나는 로봇처럼

    발딱 일어났어요

    강철 얼굴을 천천히

    당신께 돌렸어요

    내 구두를 미끄러뜨린 게

    무어겠어요?

     


     

     

     

    나의 맹세

     

    나는 역경을, 불운을, 고통을

    따뜻이 영접하지 않겠다

     

    울음소리로 미루어

    까마귀는 참 속 깊은 새인 듯싶기도 하지만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아, 저, 하얀, 무수한, 맨 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모란꽃 봉오리에 떨어진 빗방울


     

     

    하늘꽃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 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천공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 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 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은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렸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조깅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이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산오름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들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풀 숲에 피어 있는 보라색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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