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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시 모음좋은 시 2022. 3. 11. 00:17
정끝별 시인은 1988년 문학사상에 시로 등단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해오고 있습니다.
첫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을 시작으로 「흰책」, 「삼천갑자목사빛」, 「와락」,「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를 발행했고 리듬과 이미지가 충만한 시정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입니다.
자작나무는 줄기의 껍질이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이것으로 명함도 만들고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글귀를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입니다. 그 껍질은 거의 기름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썩지 않으므로 신라시대의 고분 속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華)로 쓴다. 결혼식을 화촉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옛날에 촛불이 없어서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을 대용했기 때문입니다. 자작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치밀해서 조각재로 많이 쓰이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보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자작나무로 만들어져서 그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벌레가 먹거나 뒤틀리지 않고 현존하고 있습니다.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 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퍼지는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유난히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우내 심신층에 나무 몸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온통 속 비어버린
몸이었기에 봄이 오고 여름이 왔어도 새잎
돋지 않았음을 못 보았다
무성했던 잎이 잡목들의 잎이었음을 못
보았다. 그토록 오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자작나무의 불운을 못 본 것이다.
간밤 비에 젖은 몇 개의 밑둥 혹은 등걸을
보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 앞에서 몸 숨겨버린 자작나무 몇 그루를,
이미 두엄의 색을 닮아가고 있는 생톱밥
더미를 보았을 때에야 알았다 베어진 가지
사이의 햇빛이 숲 전체를 밝아 보이게
한다는 것을, 그 빈터로 낯선 길 하나 새로이
놓이고 낯선 등걸에 잠시 앉아본다 아직
축축하다 햇빛을 따라 성글게 놓인 길에
들어선다
자작나무 숲은 또 이대로 자연스럽고 나도
익숙하게 걸어나온다 불운한 기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
자작나무 내 인생
속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 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 놓고
뼈만 솟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데워 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와락
반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럭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의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르니까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는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가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달집
저 씨앗이
저 그늘이
저 허공이
나비며 구름이며 나뭇잎이며를
따순 세간으로 들여놓고
골골이 속 깊은 고치 하나 만들며
줄창 틀고만 앉아 있는데요
저 꽃 속 씨앗처럼
저 나무 속 그늘처럼
내 몸속 달새도
오진 궁둥이에 달 물 차오르면
달집에 화약 불을 놓듯
와들와들 은빛 신기루를 털며 차고 날아
밤하늘을 밝힌다지요
허구한 날 지친 몸 한가운데
불구덩이 집을 짓는
이 뱃집 한가운데서요
희망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구멍을 제 몸 속에 넣고 다닌다
두 눈을 움푹 파헤치고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구멍에 빠질 때마다
한 삽씩 네 눈에서 퍼냈던
꽃 핀 모래가
신기루
그 허방이었니?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은는이가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를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나'는'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이 사랑을 완성해다오
사랑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행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늦도록 꽃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붇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피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소금호수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굴쭈굴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은 신발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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