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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도현 시)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13. 16:15

    목말랐던 봄의 대지에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생명을 살리는 봄비입니다.

    온 힘을 다해 꽃 피워 냈을 매화나무,

    산수유나무, 목련나무가

    오늘 마음껏 목을 축여 내일을 살아갈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나무들도 행복한

    시 읽기 좋은 날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낙동강'으로 등단하여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시로는 연탄을 소재로 한

    '너에게 묻는다'로 유명합니다. 

    시집으로 「너에게 묻는다」 「연탄 한 장」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스며드는 것」등이 있습니다.


    일기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주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어리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쓰고 버린 연탄재가 쌓여 있다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한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종이를 하트 모양으로 오려 빨래 집개를 꽂아 줄에 걸어 놓았다


    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 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돌길에 무더기 무더기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애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길가에 피어 있는 보라색 제비꽃


     

    별을 쳐다보면

    가고 싶다

     

    어두워야 빛나는

    그 별에

    셋방을 하나 얻고 싶다

     


    그립다는 것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날이 살이 썩어간다는 뜻입니다

     


    봄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봄이 올 때까지는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들판에 야생화가 피어 있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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