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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달자 시 모음 감동과 여운이 있는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6. 10:49

     


    삶의 굴곡이 많았던 신달자 시인은
    고난이 주는 선물은 고난이 끝난 후에 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1964년 '발', '처음 목소리'로 등단.
    시와 장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을 있습니다.
    시집 '종이', '아버지의 빛','어머니의 삐뚤삐뚤한 글씨',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 등이 있습니다.

     

    정원 테이블 위 책 한권과 주황색 꽃이 꽂혀 있는 화병




    01
    그리움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02
    늦은 밤에

    내가 올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잡아 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네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03
    노을

    지나치게 내성적이다
    그저 얼굴이나
    벌겋게 달아오를 뿐
    깊은 뜻 내색을 하는 일이 없다.
    새벽부터 하고픈 말
    끝내 말머리도 꺼내지 못하고
    어둠에 밀려 밀려
    속절없이 사라지고
    그러나 아주 영 사라지지는 않고
    다음날 또 다음날
    해만 지면
    타는 속을 빛깔로나 풀어놓는
    너는 나와 같은 혈액형인가 보다

    언제라도
    서로 수혈할 수 있다.

     

     


    04


    단 한 번이다
    결코 재생될 수 없다

    무례한 낙서를 연습이라고 말하지 마라
    경험이라는 말로 허물을 덮지 마라

    상호 불통을 예술이라고 하지 마라
    이미 한 장의 종이는 사용 불가

     

     


    05
    커피를 마시며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 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 커녕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06
    간절함

    그 무엇 하나에 간절할 때는
    등뼈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끝에
    푸른 불꽃이 어른거린다

    두 손과 손 사이에
    깊은 동굴이 열리고
    머리 위로
    빛의 통로가 열리며
    신의 소리가 내려온다

    바위 속 견고한 침묵에
    온기 피어오르며
    자잘한 입들이 오믈거리고
    모든 사람들이 무겁게 허리를 굽히며
    제 발등에 입을 맞춘다

    엎드려 서 있어도
    몸의 형태는 쓰러지고 없다

    오직 간절함 그 안으로 동이 터 오른다

     

     


    07
    미로

    언제나
    시작에서
    길을 잃는다

    일보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방황하며 더듬거리며
    내 마음 같은 곳을 찾아서
    걸어간다.
    내 마음 같은
    갈래갈래 엇갈린 길

    길 머리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으려 한다.

    한올의 실도 쓰일보 없는
    퇴색한 천연색 실오리를
    나는 정결히 고르고 섰다.

    동행도 없는
    밤의 숲
    머리카락 곤두서는
    아득한 무섬증

    가도가도
    그 자리
    엉거주춤 서성이고 있네

     

     


    08
    사람찾기

    둘러봐도 늘 없다
    너무 가까이 내 안에 있음일까
    이 우주안에 너 살고 있음
    나 분명 알아
    내가 알고있는 가장 높은 지식
    너 찾다 눈감는 일
    가장 아름다운 길

     

     


    09
    봄의 금기사항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10
    늙음에 대하여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별력 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리 짜 주고 싶었다

    피의 속성은 뜨거운 것인지
    그 캄캄한 세월 속에도
    실수로 흘린 내 피는 놀랍도록 붉었었다

    나의 정열을 소각하라 전소하라
    말끔히 잿가루 씻어내려라
    미루지 마라

    나의 항의 나의 절규는
    전달이 늦다
    20년 내내 전갈을 보냈으나
    이제 겨우 떠났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이젠 마음을 바꾸려는
    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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