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굴곡이 많았던 신달자 시인은 고난이 주는 선물은 고난이 끝난 후에 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1964년 '발', '처음 목소리'로 등단. 시와 장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을 있습니다. 시집 '종이', '아버지의 빛','어머니의 삐뚤삐뚤한 글씨',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 등이 있습니다.
01 그리움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02 늦은 밤에
내가 올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잡아 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네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03 노을
지나치게 내성적이다 그저 얼굴이나 벌겋게 달아오를 뿐 깊은 뜻 내색을 하는 일이 없다. 새벽부터 하고픈 말 끝내 말머리도 꺼내지 못하고 어둠에 밀려 밀려 속절없이 사라지고 그러나 아주 영 사라지지는 않고 다음날 또 다음날 해만 지면 타는 속을 빛깔로나 풀어놓는 너는 나와 같은 혈액형인가 보다
언제라도 서로 수혈할 수 있다.
04 생
단 한 번이다 결코 재생될 수 없다
무례한 낙서를 연습이라고 말하지 마라 경험이라는 말로 허물을 덮지 마라
상호 불통을 예술이라고 하지 마라 이미 한 장의 종이는 사용 불가
05 커피를 마시며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 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 커녕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06 간절함
그 무엇 하나에 간절할 때는 등뼈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끝에 푸른 불꽃이 어른거린다
두 손과 손 사이에 깊은 동굴이 열리고 머리 위로 빛의 통로가 열리며 신의 소리가 내려온다
바위 속 견고한 침묵에 온기 피어오르며 자잘한 입들이 오믈거리고 모든 사람들이 무겁게 허리를 굽히며 제 발등에 입을 맞춘다
엎드려 서 있어도 몸의 형태는 쓰러지고 없다
오직 간절함 그 안으로 동이 터 오른다
07 미로
언제나 시작에서 길을 잃는다
일보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방황하며 더듬거리며 내 마음 같은 곳을 찾아서 걸어간다. 내 마음 같은 갈래갈래 엇갈린 길
길 머리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으려 한다.
한올의 실도 쓰일보 없는 퇴색한 천연색 실오리를 나는 정결히 고르고 섰다.
동행도 없는 밤의 숲 머리카락 곤두서는 아득한 무섬증
가도가도 그 자리 엉거주춤 서성이고 있네
08 사람찾기
둘러봐도 늘 없다 너무 가까이 내 안에 있음일까 이 우주안에 너 살고 있음 나 분명 알아 내가 알고있는 가장 높은 지식 너 찾다 눈감는 일 가장 아름다운 길
09 봄의 금기사항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10 늙음에 대하여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별력 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리 짜 주고 싶었다
피의 속성은 뜨거운 것인지 그 캄캄한 세월 속에도 실수로 흘린 내 피는 놀랍도록 붉었었다
나의 정열을 소각하라 전소하라 말끔히 잿가루 씻어내려라 미루지 마라
나의 항의 나의 절규는 전달이 늦다 20년 내내 전갈을 보냈으나 이제 겨우 떠났다는 소식이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