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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은교 시 모음
    좋은 시 2022. 3. 3. 10:20

     

     

    강은교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 문학상 공모에 「순례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하게 되었다.

    시집으로 <허무집>,<풀잎>,<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 하루> 등 다수의 시집을 발간했으며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했다.

    강은교 시인 초기의 시에서는 허무의식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표현했고 중반기에서는 더욱 정교한 감각의 언어와 표현으로 현실적 시각에서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감각과 인식을 중시하던 시적 경향이 사색과 성찰의 경지로 더욱 넓고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황색 튤립을 꽂은 유리화병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메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별똥별

     

    밤 하늘에 김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황혼곡조2번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고

    쓰던 뼈는 다시

    불후의 살로 덮고

    제 아이는 

    등뒤에서

    이슬 묻혀 남겨놓지

    그래도 흐린 날은

    귀신이 되어 울지

    잊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이

     

     

     

     

     

     

     

    모기 소리보다도 작게

    십이월 햇빛 내리는 소리보다도 작게

     

    낮달 뜨는 소리보다도 작게

    노을 지는 소리보다도 작게

     

    그렇게 그렇게

     

    바람 소리보다도 크게

    바다 우는 소리보다도 크게

     

    벼락 소리보다도 크게

    눈물 출렁이는 소리보다도 크게

     

    공기의 소리이게

    떠돌 곳도 없이 가득 떠도는.

    별의 소리이게

    눈뜨지 않고는 하늘 한가운데 눈뜨는.

     

    소리 없는 소리이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엎드리게 해다오

    구름 흙 속속

    시여

    캄캄한 밝음이여.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빗방울 하나가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듯 물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리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서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서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라벤더 꽃이 꽂혀 있는 불투명 유리병 네 개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머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 여자가 있는 풍경

     

    벚나무 밑에서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고 있다.

    제 가슴을 쥐어뜯는다.

    얇은 나일론 블라우스가

    몰려 서 있는 은빛 안개를 흔든다.

     

    아침이 그치고

    여기저기 젖은 창마다

    푸시시한 얼굴들이 내걸린다.

    기웃거리는 은빛 안개.

     

    젊은 여자가 길고 높은 목소리

    벚나무 굽은 가지를 흔들며

    젖은 창마다 급히 달려가다가

    오만하게 솟은 벽에 부딪혀

    부스스 부서져 내린다.

    피가 흐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젖은 창들이 스르르 닫히고

    여자의 옆에  팽개쳐진 잡동사니 그릇들에

    이제 일어선 햇빛

    핏빛으로 반짝이며 고여 들 뿐.

     

    우리들의 벽은 튼튼하고 튼튼하다.

     

     

     

     

     

     

    연애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물의 死者들

    자정에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고독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바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그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해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마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진달래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속 깊이 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예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디 문들 길이 켜진다

     

     

     

     

     

     

    국화꽃 한송이

     

    국화꽃 한 송이

    날아간다

    날아가는

    극화꽃 꽃잎 한 장

    별이 붙는다

    별은 젖어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이 달려오는

    그대의 꽃잎 젖은

    한 장.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베니스 그림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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